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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3)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읍 갈평리 마을 입구 삼거리는 이강년 의병장 전적지로, 1907년 10일~11일 양일간에 있었던 갈평전투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갈평리 주민들과 이강년을 추모하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경모각(景慕閣)을 세웠고, 1979년 관에서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1907년 9월 9일 저녁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이 상초곡에 주둔하고 있는 이강년 의진(義陣)을 찾아와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의병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며 저녁밥을 지어 왔다. 이강년은 주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모두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이곳에서 지냈다. 9월 10일 새벽 일찍 하초곡을 거쳐 요성으로 부대를 옮겨 주둔하고 있을 때 갈평 쪽에서 포성이 울려왔다. 척후병의 급보에 의하면 어젯밤 갈평리로 들어간 조동교, 김현규 부대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의병이 대패하였으며 흐르는 시냇물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인명 피해가 크며 갈평마을은 왜군이 불러 질러 화염이 치솟고 있다고 하였다. 급히 진군계획을 세우면서 현지 정세를 살펴보니 수백 명의 일본군이 있었으나 달아난 의병을 추격하거나 마을에 숨어 있는 의병을 수색하기 위해 흩어져 있고 갈평 냇가에는 본진 50여 명, 1개소대 병력만 남아 있는데 지금 점심 취사 준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후기 의병의 주된 전술은 치고 빠지는 유격전이 대세였다. 운강 이강년은 기습작전을 펴기로 하고 제장(諸將)을 불러 사방으로 분산, 적의 주둔지 가까이 까지 은밀히 접근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내가 총을 쏘면서 깃발을 흔드는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사방에서 기습당한 일본군은 당황하여 일부는 총을 들고 저항했지만, 대다수는 도망가기 바빴다. 이렇게 하여 조동교, 김현규 의병부대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약탈을 일삼던 일본군 본진 1개 소대를 궤멸시키고(적 8명을 생포 및 사살) 일본군이 소지했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한 갈평전투는 의병 전투사에 빛나는 큰 성과였다. 이어서 9월 14일 적성전투에서 신태원 후군장 등 아군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한 후 예천 명봉사에 머물다가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단양을 거쳐 영춘으로 향했다. 9월 25일 영춘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 12일 괴산 연풍전투에서 일본 수송대를 급습하였으며, 10월 22일 원주 유치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11월 2일부터 11월 15일까지 4차에 걸친 죽령전투에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 및 격퇴하였다. 이어서 소백산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세 불리로 단양 영춘으로 퇴각한 뒤 신돌석부대와 합진하여 순흥을 공격하여 일본군 퇴각시켰다. 다시 11월 26부터 12월 25일까지 충북 단양 일대에서 유치전투, 백자동전투, 영춘궁동전투, 복상동전투, 월계동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전투를 계속하다가 12월 말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춘천 쪽으로 이동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신식무기와 탄약을 가진 정예 군인 3천 명이 합류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1908년 1월 일으킨 한성 탈환 작전이다. 총대장으로 경기도 여주 출신이며 문경으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해 오다 거의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진공 작전에 돌입했으나, 효(孝)란 절대 가치를 가진 유림으로서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이인영을 이어 총대장 역할을 맡은 창의군 군사장(軍師長)인 선산 출신 왕산 허위(許蔿)는 동대문 밖 30리(현재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일대)까지 진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다. 비록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서울진공작전은 흩어져 있던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켜 일제에 대항,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때 운강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여하였다. 운강 이강년은 해가 바뀐 1908년에도 변함없이 항전하였는데, 1월 6일 경기도 동북부 낭천전투를 비롯해서 3월 28일까지 가평 건천전투와 용소동전투, 대청동전투, 포천 청계전투에 임했으며,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는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 강릉 하사동전투와 사동전투, 홍천 북면전투, 양양 백사장전투를 계속하였다. 5월 16일에는 경북 북부 봉화 서벽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다시 6월 4일 봉화 내성전투, 6월 10일 봉화 재산전투, 6월 21일 제천 오미리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렇게 많은 전투 중에 ‘봉화 서벽전투’에서 이강년이 대승한 것을 기리기 위해 봉화군민들이 뜻을 모아1984년 12월 봉화군 춘양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항일의거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 슬프도다! 하늘도 무심하지! 강원도·충청도·경북 일대에서 종횡무진 활동하셨던 운강 이강년 선생의 13년(1896년∼1908년)간의 의병 투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청풍군 금수산 ‘작성산(鵲城山)전투’에서 발목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셨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일본군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들이 주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때 한탄하기를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또 옥중에서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라는 시를 남겼다. 의병장 이강년은 왕손으로서, 선비로서, 의병장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죽겠다며 면회 온 아들에게 구차하게 "살려 달라 하지 말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의연함을 보였다고 한다.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신 이강년 선생은 마침내 1908년 10월 13일(음력 1908. 9. 19)51세를 일기로 의기에 찬 일생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시니 하늘도 산천도 슬피 울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역에 출빈(出殯-임시 운구 안치)되었다가 나중에(12월 13일) 제천 두학동 장치미로 반장(返葬) 후 다시(1944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강년 선생의 순국 후에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호국 인물인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최영, 강감찬, 이순신, 김종서, 권율, 곽재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22분과 함께 흉상으로 모셔져 있다. 이번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순례’ 중에 ‘애국과 의병정신’이란 주제를 두고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어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내용을 소개하면, 문경시 가은읍 ‘운강이강년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선유구곡 제9곡 옥석대(玉蕮臺)에 학천정(鶴泉亭)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 鶴泉(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의 옆에는 글의 주인인 듯한 이름으로 李完用(이완용)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강년과 이완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강년과 이완용은 1858년생 동갑이다. 이강년은 22세에 무과(고종 17년-1880년)에 급제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고난의 삶을 살다 중년인 51세(1858∼1908)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전기한 바와 같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전쟁기념관 호국인물 흉상’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이완용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처신으로 부귀영화와 노년인 69세(1858∼1926)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을사오적,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는데 학생 여러분은 누가 참삶을 산 인간 승리자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였다. 문경에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84인이 계신다. 그래서 문경은 ‘의병과 독립운동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문경 출신 역사 인물 중에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다 생을 마치신 분이 많이 계신 반면에,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한일합방에 찬성하는 등 친일 매국을 하고 조국의 젊은 청년들을 희생물로 하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제물이 되도록 하여‘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문경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자도 있다. 이번 3박 4일 일정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맺음말로, 우리가 이번에 걷는 순례길에는 이강년 의병대장 외에 이름이 알려진 의병은 물론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의병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그 혼이 살아 있는 길을 걸었다. 우리가 이 힘든 산악길을 걷는 의미는 고난의 세월을 살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의병들을 기리며, 세계 유일 분단국가로서 북한의 핵 위협과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언제든지 또 다른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다 같이 의병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마음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지난 2018년 6월 1일 ‘의병의 날’을 맞아 문경에서 개최된 행정안전부 주최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에서 필자가 자작시인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란 추모 헌시를 낭독하였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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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을 지켜주는 영산(靈山),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라고 해서 주흘산은 문경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은 도읍지(都邑地) 또는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으로 나라나 고을의 난리(亂離)를 평정(平定)하거나 나지 못하게 지켜주는 주산(主山)을 말한다. 주흘산 유래 중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와 있을 때 이 산에 머물렀다고 해서 왕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임금 주(主)자를 붙여 주흘산(主屹山)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2002년 UN이 ‘세계 산의 해’ 지정을 계기로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2002년 10월 산림청에서 ‘대한민국의 산의 날’을 10월 18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선정·공표한바 있다. 산자수명한 문경에는 조선 시대 황장목(금강송)을 보호하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인 황장산(黃腸山 1,077m)과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 영봉-1,106m, 주봉-1,076m, 관봉-1,039m), 백두대간의 단전이라는 희양산(曦陽山 998m), 북한산과 도봉산을 합한 듯하다는 대야산(931m) 이렇게 4개의 명산이 있다. ‘백두대간 중심의 고장’ 문경답게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명산을 보유하고 있다. 주흘산이란 이름은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주흘(主屹)’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고 ‘고려사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흘산은 현 북쪽에 있고, 나라에서 매년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소사(小祀)를 지낸다고 하였다. 주흘산 소사를 지내는 곳은 문경읍 상리에 있는 ‘상리신당(上里神堂)’이며 신당 안에는 ‘성황지신(城隍之神)’과 ‘토지지신(土地之神)’ 이란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 나라에서 지내는 제향(祭享-제사의 높임말)은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었는데, 대사는 종묘와 사직에서 지내는 제사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사는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선농단(先農壇) 제사, 산천·성황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는 풍운뇌우(風雲雷雨), 신성한 큰 산과 바다와 강인 악해독(嶽海瀆),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잠신(蠶神)에 제사 지내는 선잠(先蠶),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우사(雩祀) 등에 대한 제사이다. 소사는 명산대천(名山大川), 농업신(農業神)인 영성(靈星), 얼음을 관장하는 신인 사한(司寒), 말을 지켜주는 신인 마조(馬祖)‧마사(馬社)‧선목(先牧), 말에게 재해(災害)를 끼친다는 귀신(鬼神)인 마보(馬步), 임금의 행차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둑에 지내던 제사인 둑제(纛祭) 등이 있었다. 그중 주흘산과 관계되는 제사는 유명한 산과 강에 지내는 명산대천(名山大川) 제사로서 전국의 23처에서 중춘(仲春)과 중추(仲秋) 초에 정기적으로 지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수시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기사에 의하면 ‘명산대천제’를 지내는 23처는 1414년(태종 14)에 정해졌는데, 경성(京城)의 목멱(木覓), 경기도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충청도의 계룡산(雞龍山)·죽령산(竹嶺山)·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亐弗神)·주흘산(主屹山), 전라도의 전주 성황(全州城隍)·금성산(錦城山), 강원도의 치악산(雉嶽山)·의관령(義館嶺)·덕진 명소(德津溟所), 풍해도(豐海道: 현 황해도)의 우이산(牛耳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 영길도(永吉道: 현 함경도)의 영흥 성황(永興城隍)·함흥 성황(咸興城隍)·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淸川江)·구진 익수(九津溺水) 등이었다. 그중 주흘산(主屹山) 산신이 영험해서인지 성종 25년(1494)에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하윤(河潤)이 임금의 쾌차를 빌기 위해 이곳에 와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성한 문경의 진산을 두고, 주흘산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역 어르신과 유림에서는 불손하다며 부정하게 말하거나 비하하면 안 된다며 핀잔을 주시는 분이 있다. 주흘산은 명산답게 곳곳에 옛길, 여궁폭포, 꽃밭서들 등 명승을 이루고 있고, 많은 문화유산과 역사, 전설을 품고 있다. 주흘산 중턱에 신라 846년(문성왕 8)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창건한 혜국사가 있고,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 조령 관문을 비롯해 명승 32호 문경새재, 기념물 18호인 주흘산 조령관문 일원, 문화재 자료 226호인 조령 산불됴심 표석, 성황당, 산신각, 문경새재아리랑 등 유무형 문화유산이 있으며 고려 왕과 관련된 대궐터, 어류동(御留洞), 전좌문(殿座門)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전국의 모든 산이 임금이 있는 한양 쪽을 향하고 있는데 유독 문경 주흘산만이 돌아앉았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돌아앉게 된 이유는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 전국의 산들이 새 도읍지의 주산이 되기를 바랐는데 소식을 늦게 들은 주흘산이 급히 달려가다가 문경에서 고개를 쭉 빼 들고 북쪽을 바라보니 이미 삼각산(북한산)이 떡하니 주산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라 그만 낙심하여 삼각산 보기 싫다며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의 전설은, 주흘산이 비록 도읍지 주산은 되지 못했지만, 천연요새를 만들어 내가 여기서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우국충정의 심정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에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조총으로 무장한 18,700명의 왜군을 거느리고 침입한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이를 막지 못했다. 이는 왜군이 두려워한 요새를 군사전략으로 이용하지 못한 사람 탓이지 주흘산 잘못은 아니다. 주흘산 이만유 작사, 황선우 작곡, 정희열 노래 백두대간 중심에 우뚝 솟은 주흘산 한국의 백대 명산 그중의 으뜸이네 경사스런 소식 많아 복 받은 우리 문경 백만 년 지켜왔고 천만년 지켜나갈 아름답고 웅장한 주흘산 아∼ 주흘산 대한민국 중심에 높이 솟은 주흘산 주봉 영봉 부봉 절경 중의 절경이네 공민왕 머물렀던 대궐터 혜국사 꽃밭서덜 여궁폭포 맑은 물 깊은 계곡 신비롭고 멋있는 주흘산 아∼ 주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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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문경의 King Road 3] 후백제 왕 견훤의 성장설화이만유(향토사 연구원) 4. 후백제 왕 견훤의 성장설화 및 전투로 (아차마을, 금하굴, 말바위, 근품산성) 견훤이 왕이 되기 전 문경 궁기에 살 때 말바위에서 용마(龍馬)를 얻었다. 견훤은 하늘이 장차 내 왕업을 돕기 위해 이 용마를 보냈다고 생각하며 말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하고 적지산 산꼭대기로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그곳에 이르렀으나 화살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화가 난 견훤이 "이게 무슨 용마냐?” 하며 칼로 말의 목을 베는 순간, "피웅∼”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나무에 꽂혔다. 말이 화살보다 빨랐다. 견훤은 "아차!” 소리를 지르며 성급한 것에 후회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緣由)로 견훤이 출생한 마을을 ‘아차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라는 용마전설이 있다.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아차마을에 한 부유한 가정에 규중 처녀가 살았는데, 밤이면 처녀 방에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 나타나서 처녀와 정담을 나누다가 동침까지 하고는 새벽이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또 다시 밤이면 나타나고 하기를 무릇 수개월이나 되었다. 마침내 처녀는 잉태하여 배가 부르게 되니 하는 수 없이 부모에게 사실을 실토하였고, 처녀의 말을 들은 부모는 깜짝 놀라 딸에게 말하기를 "그 사나이가 오거든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다가 몰래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매어라.”라고 일러놓았다. 다음 날 새벽에 실오리를 따라서 계속 찾아가 보니 굴(금하굴金霞窟)로 들어간 지라 따라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가 몸에 실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후 그 사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얼마 후 처녀는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가 후백제 왕 견훤이다라는 견훤(甄萱)의 출생 설화가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 50열전 견훤 조에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그때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라는 기록도 있다. 근품산성(近品山城)은 문경시 산양면 현리 뒷산인 근품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산성으로 토석 혼축, 편축식, 테뫼식으로 축성된 길이 1,600m 산성이다. 927년(태조 10년) 정월 왕건이 용주(龍州-예천 용궁)를, 3월에는 근품성(近品城)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견훤은 9월에 근품성을 쳐서 불살랐다. 이어 고울부(현 경북 영천)을 거쳐 신라의 도성으로 진격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였다. ★ 견훤의 출생, 성장 설화 및 전투로 루터(관광코스) : 금화굴과 숭위전⇨말바위⇨농바우⇨천마산⇨견훤산성⇨근품산성 5. 공민왕의 몽진로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복주(현 경북 안동)로 몽진(蒙塵)하러 가게 되었고 난이 쉽게 평정되지 않자 인근 지역을 순행하던 중 문경 주흘산 법흥사(法興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그런 연유로 경사스럽고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인 문경(聞慶)이라 지명이 생겼으며, 절 이름도 나라가 은혜를 입은 절이라 해서 법흥사에서 혜국사(惠國寺)로 변경되었다. 또 공민왕이 산양면 위만리에 있는 산길을 지나다가 나뭇가지에 왕의 옷(용포龍袍)을 걸어두었다 하여 그 산의 이름이 왕의산( 王衣山)이라 불렀다는 전설도 남아있다. ★ 공민왕 몽진로 루터(관광코스) : 하늘재⇨혜국사⇨대궐터⇨마전령(馬轉嶺)⇨근품산성⇨왕의산 6. 경순왕의 구국 기원로 문경 봉암사 극락전(보물 제1574호)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후삼국 시대 때 신라 경순왕이 피난 시 구국을 기원한 원당으로 사용했다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가람고(伽藍考)”와"교남지(嶠南誌)”권 36 문경군 조(1937년)에 절의 북쪽에 2층 극락전이 있고, 신라 경순왕 때 창건되어 조선 세조의 어필이 봉안되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목탑형식의 건물로서는 현재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과 함께 국내에서 단 두 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문화 자산이다. 임진왜란 때 봉암사가 불탔는데 그 당시 다른 전각은 다 타버렸는데 극락전만 불타지 않아 왜병들이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몇 차례나 지붕에 던져도 불이 붙지 않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신비감을 주는 건물이 봉암사 극락전이다. ★ 경순왕 구국 기원로 루터(관광코스) : 당교⇨금화굴⇨희양산성⇨봉암사 7. 경순왕의 귀부로(歸附路)와 마의태자의 망국 한탄로 신라의 국력이 패퇴하여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향하여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여 신라를 고려에 바쳤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시 경순왕의 행렬은 30리에 달할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행렬이 움직이기 위해선 신라의 교통로 중 제일 큰길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립령을 통과하는 길이다. 그럼 경순왕의 이동 경로를 추정해 보면 경주-영천-구미(의성)-상주(예천)-문경-충주-이천-서울-개성으로 연결되며 문경 내의 이동로는 상주에서 당교를 거쳐 토끼비리를 지나 계립령을 넘어 충주로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는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홀로 풀을 베어 먹으며 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왕자인데 월악산자락에 자리한 미륵사 대원사지는 마의태자에 의해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다면 마의태자 역시 경순왕이 갔던 길을 따라가다가 개골산으로 갔다고 추정되는데 그 경로는 경주-영천-구미-상주-문경-충주-양평-홍천-인제-금강산이 된다고 보며 문경 구간의 경로는 경순왕이 간 길과 같다고 본다. 마의태자는 나라가 망하였으니 죄인이 되고 상주가 된다는 뜻으로 마의를 걸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문경의 '토끼비리'와 '하늘재'를 넘어갔다고 보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하였으랴?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 ★ 경순왕 귀부로 루터(관광코스) : 당교⇨유곡역지⇨토끼비리⇨요성⇨관음⇨하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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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려 공민왕과 왕의산(王衣山) 왕의목(王衣木)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고려 공민왕이 용포를 걸어 두었던 나무가 살아있다” "왕의산(王衣山) 느티나무 고목,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10여 년 전에 필자가 쓴 글의 제목이다. 고향에서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 당시 마을 어른들에게서 듣고 반신반의했던 고려 공민왕이 몽진 길에 용포(龍袍)를 걸어 두었다는 나무의 실체를 퇴직 후 문화관광 해설사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현지 확인하고 세상에 알리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건의한 문건이다. 이 산이 왕의산(王衣山)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경상북도 복주(안동)로 피난을 가면서 문경을 지나게 되었다. 이곳 경북 문경시 산양면 위만2리 상위마을 뒷산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는데, 쉬면서 용포를 걸어두었다는 나무가 있기 때문에 산의 이름이 임금 왕(王) 자에 옷 의(衣) 자를 써 왕의산이 된 것이라고 한다. 또 이곳을 ‘옷걸골’이라고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661년 전, 다시 말해 1361년(공민왕 10년) 10월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11월에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피난길(몽진)에 올라 파주-이천-음성-충주-문경을 거쳐 12월에 복주(福州, 경북 안동)에 도착했다. 홍건적은 공민왕 즉위 무렵에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구성된 종교적 농민 반란군이다. 이듬해인 1362년 1월 공민왕의 특명을 받은 총병관 정세운은 이방실·안우·김득배 등과 함께 군대를 정비, 강화하여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 난을 평정하였다. 공민왕은 안동에 도착한 지 두 달여 만인 1362년 2월에 환도 길에 올랐다. 상경 때에는 조령을 넘지 않고 상주를 거쳐 청주-죽주-파주로 해서 개경으로 돌아갔다. 공민왕과 왕의산(王衣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역사와 전설을 품고 있는 우리 지역 중요한 문화자산인 이 왕의목(王衣木)을 잘 관리, 보존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행정기관에 다시 촉구하는 의미로 지난번에 쓴 글을 재차 보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왕의산'은 문경시 산양면·산북면과 예천군 용궁면을 경계로 그리 높지 않은 해발 338.6m의 산이다. 이 산 정상부에는 영남사람들이 한양을 오가면서 지나는 '문고개'라는 고개가 있고 고갯마루 바로 아래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지금은 검게 변한 속을 드러낸 채 고목이 되어 서 있다. 지난해(2020년) 문경 YMCA 주관하는 관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개 탐방 프로그램에 해설자로 참여하며 현지에 가서 살펴보니, 나무는 개미들의 집이 되고 쇠약해져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하루빨리 점검하고 보존대책을 세우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연기념물은 학술 및 관상적 가치가 높아 그 보호와 보존을 법률로 지정하는 것인데 동물의 종과 서식지, 식물의 개체·종 및 자생지, 지질 및 광물 등으로 우리나라는 약 400여 점이 지정되어 있고 나무로는 노거수, 성황림, 호안림, 방풍림, 어부림, 보해림(補害林), 역사림 등이 주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문경 왕의산 왕의목(王衣木)은 수령은 물론 나무나 숲과 관련된 특별한 고사나 전설 등이 전해지는 역사림 범주에 들어가며 천연기념물로서 충분한 자격과 지정요건을 갖추었다. 영남대로 문경에는 지정학적으로 고려 공민왕과 관련된 역사 및 전설,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공민왕이 피난 중에 난이 빨리 평정되지 않자 인근을 순행하던 중 문경에서 홍건적의 난을 물리쳤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하여 경사 경(慶)자에 들을 문(聞)자를 써 문경(聞慶)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와 문경의 진산 주흘산에 있는 혜국사(惠國寺)와 어류동(御留洞), 전좌문(殿座門), 산북면 가좌리 등이 모두 공민왕과 관련된 지명과 전설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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